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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의집 History
인보의집 히스토리를 알려드립니다.
안복임 수녀님의 성모조산소에 대한 기록 2006,8,10
성모 조산소에 대한 기록지
2006.8.10
안복임 세실리아수녀
<시대가 빚어낸 재앙과 함께>
- 성모 조산소 설립 동기와 시대 상황
현재는 경기도 성남시로 분당을 포함한 거대한 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1970년 초에는 광주대단지 또는 모란단지로 불리웠으며 당시는 자그만 원주민 마을이었다. 서울시에서는 인구분산 계획의 일환으로 청계천 위에 밀집되어 있는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건이 있었다.
어느 산모가 기아 상태에서 아기를 출산하고 허기가 지니까 갓 낳은 아기를 닭으로 착각하여 삶아 먹었다는 끔찍한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의 전말은 지금의 성남시에 위치한 ‘남한산성’ 일대 부근의 산을 어느 정도 밀어내고 그 위에 가구당 땅 20평과 임시 사용할 천막을 내주어 집을 짓게 하였는데 집 짓는 일이 즉 도시계획이 그리 쉬운 일인가? 그래도 능력이 있는 사람은 블럭벽돌(구멍난 벽돌)로 집을 지어 살 수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20평짜리 딱지를(땅문서에 해당됨) 땅 투기꾼들에게 팔아넘기고 다시 판자집이나 루핑으로된 천막으로 집을 세우고 살았다. 나중에는 이 일이 상습범까지 생겨나 임시 행정구인 출장소(시청)에서는 땅 12평을 다음에는 8평까지 나누어 주는 사례도 있었다 한다.
더 큰 문제는 이주단지 내에 생계 마련을 위한 아무런 대책(공장이나 일터)없이 사람만 먼저 옮겨 놓은 것이다. 그들의 일일 생활 터전이 서울의 을지로 5~6가 평화시장 일대인데 당시 광주대단지의 교통수단으로는 시내버스로 칠팔십여리 길을 매일 왕래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상태였다. 버스는 연일 초만원인데 도로는 비포장이라 비만 오면 버스길은 금방 아수라장 진흙탕 길이 장사진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주민들은 급기야 폭동을 일으켜 대단지의 공공건물인 출장소(시청)과 보건소 건물에 불을 지르고 난동을 일으켜 연일 매스컴을 타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 수도회에서는 이곳에 초기부터 들어가 노천에 천막을 쳐 놓고 거리에서 노는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모아 놓고 유치원 수녀님들이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블록 벽돌로 건물을 짓고 탁아소 사업으로 “새싹 어린이 집”이란 명칭으로 일을 하고 계셨다. 이때 즈음하여 박 미카엘라 수녀님께서 총장으로 계실 때 저는 건강 때문에 잠시 쉬고 있었는데 부르셨다.
총장 수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시 광주 대단지의 처해 있는 실정(산모 건)을 말씀하시면서 이르시기를 간호수녀들도 이런 곳으로 눈길을 돌려야 할 대가 온 것 같다며 시대 요청에 우리 수도회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곳에 가면 필경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이 있을 것이며 특히 소외된 곳이기에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나도 한때는 오지 마을에 가서 돕고 싶었다. 아프리카에도 가고 싶었기에 흔쾌히 응답을 드렸다.
마침 새싹 어린이 집에서 안 뽀리나 수녀님이 본원에 오셨는데 내일 그곳으로 올라 가시니 함께 동행하여 가서 곧 전셋집을 얻어 놓고 본원으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날 안 뽀리나 수녀님을 따라 광주 대단지로 올라 와 그 이튿날부터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4~5일 걸려서야 20평짜리 2층으로 된 집을 구했다. 1층은 상가로서 작은 홀과 방 한 칸이며 2층은 방 두 개에 작은 거실과 재래식 연탄 부엌으로 되어 있었다. 전세 절차 서류는 마침 오 글레맨스 수녀님의 아버님이 이곳에 살고 계셔서 조언을 해주셨고 1주일 걸려서야 다시 본원으로 내려왔다.
이때 총장 수녀님께서는 저와 산실 경험이 많은 김 비비안나 언니와 함께 소임하기로 결정을 해 놓으셨다. 그런데 비비안나 언니는 현 소임에서(전주 성모병원) 정리 되는 대로 올라갈 것이니 나는 준비되는 대로 우선 김 소피아 언니와 함께 먼저 올라가 필요한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준비라야 이불 두채 식기 두벌 약간의 물건을 간단히 챙겨서 1972년 11월 1일 광주 대단지로 파견되었다. 먼저 탁아소 새싹 어린이 집으로 들어가 수녀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챙겨 주시는 쌀과 보리쌀 그리고 약간의 밑반찬을 주셔서 고맙게 가지고 전셋집으로 왔다. 텅 빈 집에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이 한적한 분위기는 생소하기만 하였다. 날씨가 추워지니 우선 19공탄 연탄을 조금 들여 놓고 불을 지피니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처음이라 두렵지만 든든한 하느님 빽 믿고 성모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어느 때나 함께 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의탁하며 하루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우리는 뽀리나 수녀님과 함께 본당의 이 명기 베르나르도 신부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이곳에 오게 된 우리의 취지를 말씀드렸다. 앞으로 간호수녀 2명이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찾아 하려고 파견되었으니 신부님께서 도움을 주십시오, 하니 좋게 생각하시며 협조하여 줄테니 잘해보라고 말씀 해 주셨다. 우선 마음이 놓였다.
날씨가 추워지니 우리도 겨울 대비를 위해 약간의 김장을 동치미와 배추 김치를 담았다. 그러나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할까?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기아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인구문제에 대한 대응책으로 물리적 요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기계사용과 약물요법외 산아조절을 위해 여성에게는 낙태수술을 남성에게는 정관수술을 대대적으로 권장하고 홍보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포스터 이용에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기르자.”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남성들에게 정관수술을 무료로 해주고 권장했다. 새로운 포스터에는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하는 홍보와 동시에 반상회 때마다 적극적인 지원을 서둘렀다. 급기야 피임방법으로 사용하는 약물 부작용과 루프 사용 시 부작용이 속속들이 나타나면서 낙태수술 후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아 부인과적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어 병원마다 부인과 질환 환자들로 붐비었다.
우리 교회 내에서도 윤리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생명 경시 풍조가 날로 심각성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가톨일 교회에서 권장하는 가족계획 상담실을 생각해 보았다. 홍보 대상으로는 본당 신자들과 새싹 어린이 집 자모들을 대상으로 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에 본당 신부님께서 저를 부르셨다. 이번에 서울에서 가족계획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이 몇 주간 있는데 간호수녀님이 다녀와 본당 신자들에게 교육시켜 달라고 하셨다. 이분야는 본당 수녀님보다 의료분야의 수녀님이 합당할 것 같아서 부탁드린다고 하셨다. 저로서는 퍽 다행이었다. 나도 지금까지 이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가족계획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이미 각 교구의 큰 종합병원에서는 산아제한 문제로 가족계획 상담실을 운용하고 있었다. 또한 후속 조치로서 각종 홍보물과 의사들의 교육도 뒤따랐다. 이때만 하여도 이 분야에 수도자들은 쑥스러워 할 때였다. 그리고 수녀들이 민가에 들어와 산다는 것 자체도 생소하게 여겼다. 허지만 워낙 낙태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신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자들은 양심의 문제와 정신적인 압박감 때문에 이 분야에 수도자들이 전문적으로 신자들 곁으로 찾아 간다는 것에 오히려 호의를 갖고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교육을 받고 본당 주보에 가족계획에 대한 교육이 있음을 알렸다. 젊은 부부들은 남편과 동반하여 오시도록 권고하고 본당 신부님의 공지사항으로 중요시 말씀하셨기 때문에 홍보가 잘 이루어졌다. 많은 신자분들이 이 교육에 참석해 주었고 또 참석 못하신 분들에게는 언제든지 상담해 드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분야에 더 필요로 하면 의료시설도 계획할 예정이라고 언급해 놓았다. 그 후 상담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신자건 비신자건 낙태수술 경험이 적게는 2~3회 많게는 7~11회까지 경험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에 따른 부작용 때문에 어머니들은 남모르게 고생하며 얼마나 불안하게 생활하는지 비참에 보이기까지 하였다. 상담이 많아지고 산 전후 간호에 대한 교육이 아주 시급하다는 것을 매우 마음 아프게 생각했다.
그런데 전셋집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자고나면 연탄가스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때에는 전화가 없어서 사고가 생겨도 신속히 알릴 수가 없었다. 혹 새벽 미사를 못 가게 되면 탁아소의 수녀님들이 궁금하여 찾아오시는 경우인데 거리가 제법 되었다. 한 번은 김 소피아 언니께서 연탄가스로 쓰러졌는데 마침 주인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그에게 의사의 왕진을 부탁드렸으나 한참을 지나서 돌아와 하시는 말씀이 이곳에서는 왕진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약국에 가서 5% 포도당을 사다 달라고 해서 그 주사를 맡고 정신이 돌아왔다. 그 후에는 아무리 추워도 밤에는 꼭 방문을 열어 놓고 잤다. 얼마 쉬 김 소피아 언니는 다른 병으로 수술을 받게 되어 본원으로 들어가시고 때마침 기다리던 김 비비안나 언니가 한 달이 되어서야 파견되어 왔다.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이곳 사정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곳 실정으로 보아 상담 교육만으로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에는 이약하고 활동에도 제한을 받아 활발하게 일을 하려면 의료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고민하며 의료개설 허가를 받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다음 날 서울 대한 간호협회를 찾아가 이곳 실정을 말씀드리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모자보건 사업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산면허 소지자로서는 모자보건 사업에 조산소 개업을 하면서 이 분야에 활발히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숙 수산나 국장의 말씀과 협조에 힘을 얻었고 이에 따른 정보와 의료법에 대하여도 많은 상식을 알려 주셨다. 그리하여 다음 날 보건소 시설과에 들려서 조산소 개설허가 신청을 해놓고 필요한 서류 준비와 이에 따른 설비 내용에 대한 과정을 듣고 와서 준비를 하는데 제법 까다로웠다.
규격에 맞는 시설과 의료장비 및 이에 따른 부수적 준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서류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니 1개월이 훨씬 넘어서야 의료개설(조산소) 허가가 나왔다. 드디어 1973년 1월 23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 188번지 전셋집에서 “성모조산소”란 간판을 걸고 탁아소 수녀님들과 본당의 오 만환 수산나 수녀님 그리고 본당신부님을 모셔다 조촐히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새벽미사를 다녀오는데 대문 앞에 허름하게 보이는 형제님 한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을 들어보니 자기 부인이 어제 초저녁에 애기를 낳고 지금까지 후산을 못하여 왔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너무 오랜시간이 걸려서 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말씀드리니 형제님께서 병원을 갈수가 없으니 꼭 함께 가달라고 한다. 우리는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서둘러 따라 간 곳은 우리집 옆 언덕위 텃밭에 가건물로 세운 천막집이었다. 들어가 보니 맨 땅위에 거적떼기 몇장 펴놓고 그위에 담요 한 장 깔고 산모가 누워있었다. 서둘러 후산을 도와드리고 적절한 치료를 해 드렸지만 출산 후 시간이 너무 지연되어 마음이 안 놓이니 잘 보살펴 달라하고 돌아오며 아무 사고 없기를 기도했다. 우리는 딱한 사정을 생각하며 갖고 있는 약품으로 성의껏 치료를 해 드렸고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 뒤 완쾌되었다.
그날 뜻밖에 지례본당 윤에릭 신부님께서 우리 집을 찾아 오셨다. 우리는 그 동안 있었던 실태를 나누었는데 윤신부님께서는 이런 비참한 상황을 들으시고 어제 그 천막집도 둘러보시더니 관심이 많으셨다. 그 후 독일 정부에 미세리올 구제위원회에 보고를 하시고 원조를 청해 놓으신 모양이다.
어느 날 아침 신사 한 분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알 수 없는 분인데 말씀인즉 이 집은 집달이에게 넘어갔으니 1주 이내에 집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날 벼락이람! 이 집을 들어올 때에는 공증서류까지 구비해서 전세를 들었는데 이런 경우가 잇을 수 있는 일이냐고 반문하니 실은 전세비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신사분을 따라서 복덕방으로 갔다. 거기서 우리의 사정을 듣고 난 신사분은 참으로 난처하게 됬습니다 하며 수녀님들은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시는데 하면서 전세비와 이사비용도 드릴테니 집은 꼭 1주일 후에 이사를 해주셔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총원과 상의를 드려 집을 매입하기로 하고 집을 보러 다니는데 1주일이 지나도 집을 구하지 못하여 결국 집 주인이 짐을 싣고 오겠다하여 우리는 2층 수녀원을 1층 상가 단칸방으로 옮겨놓고 단칸방에서 상담도 하고 산모가 와도 함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난민 생활이 따로 없었다. 집 주인도 도리가 없었다. 상가 주택으로 1층에 방 3개 있는 집을 구하려니 무척 귀했다. 10여일이 지나서야 단층으로 된 상가 주택 20평짜리를 찾게 되어 들어가 보니 꼭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인데 수리하여 살기로 하고 복덕방에서 계약을 해 놓았다. 그리고 잔금 치루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그 날짜에 총원에서 돈이 오지를 않아 속을 태우고 있는데 복덕방 아저씨께서 우리에게 통장과 도장을 주시면서 필요한 만큼 찾아다 쓰라는 것이다. 수녀님들을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겠냐고! 우리는 너무 감격하여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하며 이 고마운 아저씨에게 몇배의 은혜를 내려주시라 기도하였다.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서둘러 집수리를 하고 도배를 하여 이사를 하기까지 1개월이 걸렸다.
내 집 마련하고 며칠 안 되었는데 초저녁에 왕진을 청하여 상태를 알아보니 6개월 조산인데 병원 갈 처지도 안 되었지만 수녀님들이 꼭 가셔서 산모라도 한 번 만나 주시는 것이 소원이라 한다. 우리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사정이 딱하기에 따라 간 곳은 집과 집 사이 골목을 막고 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들어가 보니 산모가 누워있었고 옆으로 한 사람이 앉아 있으면 더 이상은 들어갈 수도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사모를 타고 반 자세를 하고 일을 돕는데 산모는 보기에도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6개월 조산아는 받아서 놓을 데가 없어 쟁반에 담아서 산모 배위에 올려놓고 후산 처리를 도왔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행히 일을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광경이 떠올라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 경우가 되었든 우리를 필요로 하여 찾을 때에는 우선 가서 보고 사정을 들어주는 것이 빈민들을 돕는 것이고 사후 처리는 상황에 따라 결정하도록 우선 찾아가 주는 것에 중요시 했다.
1973년 7월1일부로 광주 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이 되었다. 동시에 인구는 날로 불어나고 병의원은 물론 소산소도 협회지부가 생겼다. 어느 날 협회지부로부터 통보를 받고 찾아가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우리까지 다섯 개 업소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기모임을 가지면서 정보를 나누자고 하는 자리에서 다른 조산원이 하는 말이 수녀님들이 무료로 하면 우리는 사업에 지장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협회에서 지정된 금액이 얼마냐고 했더니 분만비 3,000원이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협회에 지장드리지 않겠노라고 했다. 기가 막힌 것은 조산소에서도 낙태수술을 해 주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일은 윤리에 해당하는 일이니 앞으로 1개월만 근절하셔서 생계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면 저희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했다. 알고 보니 개신교 신자 두 업소 천주고 신자 두 업소 였기에 우리말에 거부할 수 없었다. 다음 정기 모임에서 만났을 때 서서히 근절되었고 물론 생계에도 지장이 없었다. 우리는 생명경시풍조에 계몽을 앞장섰던 것이다.
우리 집은 상가 주택이라 양철 덧문이 네 짝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밤중에 오시는 분들은 양철 문을 발로차고 두 손으로 두드리면 이 일대는 소란하기 이를 데 없거니와 늘 응급환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잠옷을 입을 생각을 못한다. 어느 날도 마찬가지 였는데 한 밤중에 왕진을 청해왔다. 금방이라도 숨 넘어 갈 것 같이 문을 두드려 대고 소리를 친다. 나는 왕진 가방을 들고 청하러 오신 분을 따라 가는데 성남의 특징은 마을이 거의 언덕으로 이루어졌다. 주인은 다급해서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달리는데 나는 날씬하니까 따라 갈 수 있지만 비비안나 언니는 워낙 헤비급이라 우리가 정상에 오르면 중턱에 오르고 주인이 골목길로 들어서면 나는 언니를 기다렸다. 또 릴레이 식으로 주인을 따라 가는 것이 어찌나 우습기도 한지... 골목길로 몇차례 돌아서 당도한 집은 토굴같은 천막집인데 들어가 보니 방이 비좁아 산모는 대각선으로 누워있고 땀방울로 법벅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람살리라고 비명을 질러 댄다. 남편은 모퉁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살려만 주세요 하며 애원하는 모습이다.
산모를 안심시키고 진찰을 해보니 애기는 곧 출산을 하게 생겼는데 탈진 상태에서 힘을 못쓰고 있는 것이다. 5%포도당을 꽃아주니 안도의 숨을 돌리면 순산을 했다. 후산까지를 잘 마치고 방안이 하도 침침하여 사방을 둘러부니 가느다란 촛불하나가 칸막이 해 놓은 부엌과 방을 비추는 불빛이었다. 부엌을 들어가 보니 쌀 한 되박쯤 있고 19공 연탄 두장이 모두였다. 다음 날 우리는 분유와 미역을 사 가지고 방문하여 주의를 살펴보니 수도도 없이 공동 수돗물 날라다 먹고 하수구도 변변치 않아 산모의 뒤처리 빨래물 버리기에도 매우 힘들었다. 때로 우리는 보호자가 없을 때 산후 빨래도 해주고 오게 되는데 핏물 버릴 데가 없어 전전긍긍하며 남의 눈에 안띠고 버리고 올 때도 있었다.
가난은 국가도 못 당한다 하지만 우선 임부나 산모들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솟아 올랐다. 나는 서울 가톨릭 구제위원회를 찾아가 충무로에 계시는 최재선씨를 만났다. 그리고 이곳의 비참한 상황을 말씀드리고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미 나와 있는 양곡이 거의 떨어져 가는 상태라 큰 도움은 못 주더라도 약간은 있으니 실태파악을 하여 서류를 만들어 제출해 보라는 것이다. 어렵게 서류를 만들어 제출해 놓으니 옥수수가루만 30포가 나왔다. 1포당 20명분인데 우리는 1포를 4인분으로 나누어 분리해 놓고 더 어려운 분에게는 1포를 두 분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그해 겨울 추위가 심해 어려웠지만 임산부와 산후 조리중에 계시는 분들에게는 훈훈한 겨울이 되어 젖이 모자라는 분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
하루는 가정방문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극빈자 방문까지 하고 돌아오느라 정오 늦게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손로사 언니가 푸념을 하는 것이다. 혼자 집에 있다가 임산부가 들어오자 홀에서 양수가 터지니 애기가 곧 나올 것 같아 밖으로 나가 옆집에 놓여있는 리어카를 끌어다 산모를 타게 하고 가까운 정지의원(우리 수도회에서 퇴회한 여의사 금옥례 모니카 선생님)으로 보냈는데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다. 보호자 없는 응급 산모를 보낸 것이 미안하여 찾아가 죄송한 말씀을 드리고 분만비를 저희가 도와드리겠다고 하니 분만비는 무료로 해 줄테니 애기 기저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저귀 감 반 필을 끊어다 드리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 외도 산모 관계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늘 잘 도와주신다.
며칠 뒤 대 낮에 왕진을 청하여 간 곳은 태령동 달동내로 불리우는 충현탑 뒤 산비탈 마을인데 거의가 천막집이다. 또한 그날은 사순시기 금요일이라 아침 단식을 한 상태에서 왕진 가방을 들고 또 한 사람은 3kg 모래주머니(후산 때 꼭 필요함)를 들고 넓은 언덕길을 지나 차로를 지나서 산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 산모 집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이미 기진맥진 해 있었다. 그런데 산모를 살펴보니 임신중독에 부종이 심하고 혈압이 매우 높아 있어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라 병원으로 옮기려는데 대책이 어려웠다. 택시를 불러도 올 수 없는 골짜기라 할 수 없이 홋 이불을 들것삼아 산모를 운반하여 찻길까지 옮겨 놓으니 천리길이라도 내려온 기분이다. 택시를 오래 기다려 한 대를 잡아 태워 병원으로 보내니 얼마나 다행인지 고마웠다.
그날 저녁 무렵에 지붕위로 빨래를 걷으러 올라갔다. 우연히 옆집 저녁상을 보게 되었는데 상 위에는 수제비 한 그릇씩 식구 수대로 놓여 있고 간장 한 종지가 전부였다. 마음이 짠하여 그 뒤 우리도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고에 동참하고자 하루 한 끼는 얼마동안 밀가루로 끼니를 해보았다. 하루는 저녁 무렵인데 왕진을 청해서 간 곳은 셋방에 사시는 분으로 아이들 5명과 산모가 끼니를 굶었다는 이야기를 주인이 해준다. 보호자 없는 임산부를 진찰을 해 드리고 말씀을 들으니 자궁 외 임신으로 가정되어 성모의원으로 옮겨드렸다. 의사선생님이 진찰을 해 보시더니 자궁외 임신이 맞는다고 한다. 그러니 속히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보호자가 없다. 우리가 보호자 역할을 하기로 하고 수술비도 성의껏 지불해 드리겠다고 하였다. 마침 원장님이 가톨릭의대를 나왔고 산부인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의술이 좋았다. 보호자는 노동을 나갔지만 들어와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때는 가장들이 사업에 실패한 분들이 많아 가출하고 없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날 찾아 뵙고 인사드리니 수술은 잘 되었고 수술비도 저렴하게 해 주셨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걸려서 밀가루 반포 있던 것 갖다주고 돌아왔다.
어느 날 남한산성 바로 밑에 동네에서 왕진을 청하여 저녁 10시경 갔는데 출산을 도와주고 나니 버스 통금시간이 끝났다. 걸어서 집까지 오기에는 너무 먼 길이라 버스 종점도 한참 내려와야 하는데 회사로 찾아가 어려운 말씀을 드리니 버스 한 대를 내주어 무사히 집에까지 데려다 주셨다. 비비안나 언니와 분다 언니는 신이나서 들어왔다 전세버스도 아닌데 독단으로 태워주셨고 완전 봉사해 주셨다는 것이다. 실은 며칠 전 그 회사의 안내양 한 분이 몹시 아픈 것을 발견하고 회사에 들어가 사장님께 부탁하여 데려다 정지의원에 입원시켜 놓고 약 1주간 죽을 끌여다 주고 완쾌 후에 데려다 주었더니 몹시 고마워하였다.
한 번은 조산소로 분만을 하러 오신 임산부가 애기를 출산하고 2박3일간 식사도 하루 3~5회를 잘 드시고 퇴원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느 사이엔가 애기는 그대로 놔두고 산모만 사라졌다. 난감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며 고민을 하고 키우다가 가정이 좋은 분 나타나면 국내 입양을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상담자 중에 입양을 원하는 분이 생겼다. 이분은 남편이 직업도 있고 자기 집도 있고 우선 생계에 걱정이 없는 분으로서 자녀 출산을 전혀 못하신 분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면 애기를 개구멍으로 넣어 달라는 부탁이다. 어렵기는 하지만 국외로 보내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이 들어 약속을 해 놓고 다음 날 저녁 밤12시경 대문 앞에 내려놓고 애기를 조금 올려놓고 돌아오는데 어찌나 다리가 떨리고 두려운지 이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달려왔다. 다음 날 연락을 받았다. 애기는 잘 들어왔고 애기 아빠 되실 분도 퍽 좋아하셨다고 감사함을 전해주었다.
그 후 서울교구 수녀연합회 주체로 농촌사목을 위한 세미나가 명동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교육관에서 있었다. 이때 성모조산소에 대하여 사업 소개를 부탁받아 세미나에 참석 겸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이미 세 수도회에서 현장체험 사례발표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이 자리에는 예수회 정일우 신부님(빈민사목의 대부로 알려짐)께서 함께하여 주셨다. 순서대로 세 수도회에서 사례발표가 끝나고 평가에서는 정일우 신부님께서 성모조산소에서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하여 과분한 격려와 좋은 평가를 해 주신 것으로 기억된다. 신부님 말씀에 의하면 빈민 사목을 위해서는 이해타산이 앞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먼저 현장에 뛰어들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문제점을 찾아 헤쳐 나가고 대응책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대단지의 열악한 지역에서 인보성체회 수녀님들이 계획 이 들어가 모자보건 사업에 투신하였다는 것은 대단하며 더구나 의사 이 두 생명을 도와주는 일은 위험을 무릅쓴 일이라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
우리 사회가 1970년대 초만 하여도 빈곤에 허덕였고 도시개발로 인하여 새로운 도시빈민이 속출하고 빈민들은 여전히 소외당하고 쫓겨 다니는 참상이 현실로 빚어지고 있었다. 그중에 무허가 건물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난폭행위로 인하여 당하는 아픔을 우리는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정일우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농촌사목 또는 도시 빈민사목이 현시대의 요청이며 그러므로 교회나 수도자들이 시대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요구에 민감하게 부응해야 된다는 것이다. 세미나 이후 성모조산소에는 타수도회 수녀님들이 견학하러 오셨고 들러주실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많은 수도회들이 활동 수도회로 전환하려고 부심하였으나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인보성체회 수녀님들이 앞장서 주어서 장하고 감사하다고 하셨다. 이번 세미나를 통하여 소개된 성모조산소의 사례 발표가 귀감이 되어 자기들도 용기를 내어볼까 한다고 하였다. 오랜 후 부산 분도회 수녀님들이 분도병원 의사들을 의지하여 산동네에서 시작은 했지만 얼마 못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수원교구 수녀 연합회에서도 성모조산소에 대하여 소개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와 1시간의 기회를 주셔서 사례발표를 해 드렸다.
한 번은 새벽 2시에 성남경찰서에서 백차가 우리를 요청하여 데리고 간 곳은 분당 야탑동 산골 동네의 응급 산모집이었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출산을 해놓고 방바닥에는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이일을 어떡하라구! 안 됩니다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였지만 보호자인 남편은 안 됩니다. 산모가 죽기 일보직전인데 안됩니다. 수녀님들이 한 번만 보아주십시오. 백차는 우리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기가막힐 일이로구나 우리도 모르게 기도를 크게 하면서 하느님 도와 주십시오 이 불쌍한 산모를! 맥박을 짚어보니 잡히지를 않는다. 혈압을 측정해보니 60에서 겨우 잡힌다. 산모의 모습은 사경에 가까이 와 있다고 생각하면서 왕진 가방에 있는 약을 쓸 수 있는데 까지 다 써드리고 다시 진찰을 해보니 맥박이 잡히고 혈압이 70, 80, 90, 100까지 상승하는 것이다. 산모 상태가 호전되고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이 되어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남편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수녀님들만 있으면 살릴 것 같았다는 확신 때문일까 더불어 우리도 고마웠다. 이럴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셨고 성모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살아갔다. 절대로 요행이 아니고 하느님의 도우심입니다. 감사합니다. 교통수단이 하루에 2~3회 밖에 없는 곳이라 첫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해는 중천에 와 있었다.
지 데레사 언니가 소임을 오게 되었다. 한 번은 아주 힘든 임산부가 찾아왔다. 경산인데 첫 애기 때 나팔관 임신으로 인하여 한쪽을 절제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3년 만에 임신이 되었는데 연세가 많았고 노산이라 큰 병원으로 가시도록 안내를 해드렸다. 그러나 자주 상담을 오셔서 친절히 해드렸다. 출산달이 되어서 또 찾아 오셨기에 꼭 병원으로 가셔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산기가 있다고 오셨기에 빨리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가시라고 보냈는데 집에 다녀오셨을 때에는 이미 출산이 임박해 있었다. 돈도 없고 수녀님들 집에서 낳아야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급기야 출산이 시작되어 애기를 순산했지만 혹시나 염려되어 비비안나 언니를 산모 곁에 앉혀놓고 우리는 산 후 처리를 하고 있는데 출혈이 시작되는 것 같다고 하여 남편에게 연락을 취하려는데 마침 남편이 도착했다. 무조건 택시를 불러 종합병원으로 옮기려는데 성남시로 승격 후에 길거리마다 파헤쳐 공사 중이라 택시를 문전에 댈 수가 없었다. 30m쯤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어렵게 산모를 운반하여 지데레사 언니와 나는 산모와 남편을 모시고 한양 대학병원으로 달렸다. 병원 문턱에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기에 옮겨 타고 응급실고 가던 중 시동이 걸리지 않아 결국 다른 앰뷸런스가 나와서 모셔갔는데 병원에 AB형 혈액이 없었다. 서울 시내 종합병원에 연락하여 겨우 2병을 구해 수혈을 했으나 출혈이 멎지 않아 새벽 4시에 산모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지데레사 언니와 나는 어제 오후부터 빈속이어서 새벽이 되니 어찌나 을씨년스럽던지 8월인데도 새벽에 춥기까지 하였다. 남편을 위로해드리고 우리는 허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성남으로 돌아오는 버스길은 외로운 먼 길이었다.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은, 하느님 이럴 때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모님, 도움의 손길을 간구합니다. 그날부터 덧문을 닫아걸고 고심을 하였다. 앞으로 닥쳐올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 날 정오에 장정 세분이 찾아 오셨다. 그리하여 만나 뵙고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소상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고발하시려면 솔직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렸다. 장정 세분께서는 알겠다고 하더니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셨다. 우리도 찹찹했다. 가족들이야 오죽하랴! 그 다음날 장례를 마치고 또 3분이 찾아오셨다. 나는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진정시키며 주님 제 한 목숨 내 놓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세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인사를 나누더니 그동안 수녀님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자기 매형이 천주교 신자라면서 인사를 시키며 사례비 봉투를 내놓는 것이다. 너무도 뜻밖에 일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사양을 하였다. 그랬더니 굳이 내 놓으시면서 사정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자기 집이 아니고 곧 내 놓을 때가 되었고 사실 자기 형편으로는 애기를 도저히 키울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 수녀님들께서 맡아 주시라고 그러나 수녀들이 맡아서 종래 키울 수는 없는 것이고 우선 사정이 딱하여 며칠을 돌보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랬더니 적당한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수녀님들께 맡기겠습니다 하여 우리는 수고비로 내 놓으신 봉투와 조의금으로 성의를 다해 보태어 드렸다. 우리는 아기를 정성껏 1주간을 키웠는데 한 밤 중에 느닷없이 열이 나면서 울어대는데 어찌나 어려웠던지 말하기를 엄마 있어 돌보는 것과 엄마 없이 돌보기는 걱정이 되어 더 이상 키울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다음 기회에 성남시 아동 부녀과에 의뢰하여 보냈다. 적합한 가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어려웠다.
우리는 그동안 상담 및 진찰 임산부가 늘어나 20평 집 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윤에릭 신부님께서 연락이 왔다. 독일 미세리올에서 원조 문제로 한국에 내한하여 나오게 되는데 이때 성모 조산소도 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곧 신부님께서 먼저 이곳에 오신다고 하셨다. 며칠 뒤 신부님이 오셨는데 우선 이곳의 시급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20평짜리 집을 매입하여 신부님께서 마련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복덕방에 의뢰하였는데 바로 우리 집 옆집이 상가 주택인데 복덕방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방 두 칸에 넓은 홀이 상가로 사용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집과 사이는 층계하나 놓고 다닐 수 있는 좁은 공간이어서 매우 유리하였다. 이집 역시 우리를 위해 미리 마련이나 해 놓은 듯이 수월하게 매입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방이 모자라 때로는 산모 곁에서 혹은 발치에 누워 이불 끝자락만 덮고 함께 생활할 때도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밤은 왜 그다지도 춥던지 그래도 산모가 순산만 해주면 고맙기만 하였다. 20평짜리 집 한 채가 더 늘어났으니 어느 정도는 언니들끼리 만이라도 밤잠을 잘 수 있다고 생각하니 윤에릭 신부님께 대단히 감사드리고 싶었다. 늘 우리를 감싸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독일 미세레올에서 손님이 나오셨다. 윤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점심 한 끼를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하여 간단히 성의껏 해드렸지만 너무 간소하게 해드려서 무척 죄송하였다. 윤신부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여드렸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하셨다. 허긴 우리도 손님이나 오셔야 단무지라도 사 먹었다. 임헬가 언니께서 임시로 소임을 오셨다. 그러나 20평짜리 집 한 채가 늘어났어도 입원 산모 3명만 들어오면 언니들 숙소가 모자라 한 밤에 탁아소 집으로 가야하는데 항상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러면서 헬가 언니는 겨울에 홀에다 19공 연탄난로 하나 피워놓고 추운 겨울을 지내야만 했다. 연탄재 하루 나오는 양이 대단했다. 쓰레기차가 종을 울리면 식구가 있는 대로 나와서 빨간 고무다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바께스 들고 하여 경사된 길을 달려가야 간신히 버리게 된다. 차가 어찌나 빨리 떠나는지 조금만 지체하면 그 날은 못 버리니 늘 연탄재와 실갱이를 해야 한다. 그래도 쓰레기 차 아저씨들께 한 겨울 따끈한 차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어 준비를 해 놓고도 기회를 놓쳐 못내 아쉬움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사건 한 가지는 그해 겨울 몹시 추웠다. 언니들이 돌아가며 감기를 앓았고 손로사 언니가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마지막으로 로사언니가 몸살이 났다. 그런데 미처 회복도 되기 전에 목욕을 꼭 해야 되겠다고 하여 조심에 조심을 부탁하였다. 추우니까 부엌에서 빨간 고무다라를 놓고 목욕을 하는데 신경이 쓰여서 자주 앞을 지나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부엌문 앞을 지나는데 인기척 소리가 들리지를 않아 혹시나 하고 노크를 했더니 잠잠하여 문을 열어보니 정신을 잃고 걸쳐있는 것이다. 너무 놀라 뛰어 들어가 물속에 있는 몸을 건져서 문턱에 올려놓았는데 더 이상 꼼짝도 할 수가 없어 소리를 질렀다. 언니를 오라고하여 마루에 올려놓고 앰뷸런스를 불러놓고 옷을 입혀 병원으로 옮겨 간신히 치료받고 살려 놓았다. 연탄가스 때문에 우리도 자주 사고가 났고 고생을 했었는데 위험하게 사고를 치루었다. 이 지역 자체에서도 가스사고가 많아서 여유 있는 병원에서는 가스사고 환자를 치료하는 산소탱크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도 가스사고를 여러 번 치르다보니 민감해 있었고 자주 마시는 가스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뒤로 넘어갈 듯이 흔들리는 증세가 생기고 기억력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고민 중에 있었다. 때마침 총장 수녀님께서 오셨는데 가스배출기가 새로 나왔다고 알려 주셔서 구입하여 달아 놓으니 살 것 같았다.
총장수녀님께서는 저희들 사는 것이 너무 고생을 한다며 회지에 부지깽이 하나라도 여유가 있으면 성모조산소로 보내달라고 하셨다. 이곳에 오실 때에는 양손에 무엇인가를 꼭 들고 오시며 어미닭같이 물어다 먹이고 살펴주시는 따뜻한 마음이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셨다. 하지만 그 시절 사회가 얼마나 어렵고 각박했던가. 부지깽이 하나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회원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비난하고 외면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자들이 굳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그래도 열심히 하면서 두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일을 했다.
하루는 산모는 세분인데 애기는 6명을 받은 날이 있었다. 오전 중에는 쌍둥이를 받고 초저녁에 비비안나 언니와 지데레사 언니와 분다 언니는 왕진을 가서 세쌍동이를 받고 왔다. 나는 그때 대수술을 받고 1주일도 안되어서 집에 남아있었는데 또 산모가 들어왔다. 도리 없이 출산을 시키는데 다행히 헬가 언니가 있어서 도와주게 되었다. 애기를 받아 놓고 헬가 언니더러 목욕을 시켜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갓 낳은 애기라 겁이 나던지 엄지발가락 하나만 들고 수건을 꼭꼭 눌러만 주니 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음이 나오는데 참아야 하니까 눈물만 흘렸다. 그래서 애기 6명을 받았는데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에피소드가 되었다. 왕진에서 돌아온 언니들은 세쌍둥이 받은 것 때문에 이야기를 멈추지 못하고 신기하고 즐거워하였다. 사실은 늘 다니던 산모였는데 앉으면 배가 땅에 닿았다. 그리하여 큰 병원에 가서 순산하도록 독려했는데 형편이 어렵다고 병원을 못가니까 우리의 왕진을 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산모인지도 모르고 간 것이다. 다행히 순산이라 감사로웠다. 다음 날 우리는 애기포대기 3개와 분유를 사다드리고 보건소에 세 쌍둥이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들 셋이 모두 건강하였다.
성주간 목요일 저녁이 되어 만찬미사를 가려고 하는데 왕진이 걸렷다. 알아보니 수진동 성당 부근이어서 다녀오면 밤조배라도 갈 수 있겠다 생각을 하고 보호자를 따라 나섰다. 성당 바로 옆집인데 들어가 보니 임신중독 환자인데 부종이 있고 형압이 높았다. 그리하여 병원으로 모실 것을 적극 권하고 나오는데 통사정을 하는 것이다. 애기가 곧 나올 것 같은데 어떻게 병원으로 갈 것이며 형편이 어려워 병원을 못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하여 절대로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하니 병원에 못가서 죽으면 도리 없지만 수녀님들께 원망 안 드릴테니 산모를 할 수 있는데 까지만 도와 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출산이 시작되어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애기는 낳았는데 산후처리가 안되어 애를 먹고 부종 때문에 출혈을 예방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새벽이 되었다. 다행히 밤새 치료하여 산모는 상태가 호전되었고 예수님 수난 밤을 산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되었다. 기도 없이는 한 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일들이 매일 벌어지는 것이다.
골목길을 빠져 나올 때에는 온통 연탄가스에 휩사여 코를 막고 지나 갈 때도 많은데 이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고생하던 로사 언니가 소임을 마치게 되었는데 그때가지 우리는 여유 있는 생활을 못하였다. 그리하여 바람을 쏘여주고 싶어서 갈 곳을 물으니 시골 우리 집 군자에 가자는 제안이 나와 모처럼 4명이 함께 길을 나섰다. 우리는 비록 좋은 곳은 못가고 시골 풍경을 그리며 마냥 즐겁게 집에 도착했다. 늦가을이라 시골에는 널려있는 것이 많았다. 그런데 놀러온 언니들이 놀지는 않고 들로 나가 온갖 푸성귀와 야채 등 심지어 고춧잎까지 가마솥에 삶아내어 좋은 햇볕에 말리고 오이, 호박, 고추, 토마토, 감, 고구마, 감자 등 부대자루로 여덟 뭉치를 해 놓았다. 식사는 친척집에서 이집 저집 초대하니 언니들은 즐거운 모양이다. 이때 어머니 말씀이 수녀님들이 어찌 그리 억척같으냐? 놀다 가라고 나는 옥수수도 쪄 놓았는데 일만하니 참 신기하구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왜 그다지 일을 많이 하지?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시골에 오니 즐거워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했다. 하룻밤을 즐겁게 지내고 다음 날 버스를 타고 오는데 시골 버스라 인심도 좋았다. 몽땅 실어주었다.
성남에 도착하여 버스 정류장에 내려놓았는데 집에까지 운반할 일이 난감하였다. 그런데 멀리서 청년들이 몰려오는데 혹시나 불량청소년은 아닐까 하였는데 우리 앞에 짐을 보더니 한 자루씩 번쩍번쩍 들어다 우리 조산소 앞에 내려놓고 가는 것이었다. 하도 고마워서 알아보니 가까이 있는 가내공업 일을 하는 청소년들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호박 부침이를 하여 푸짐하게 나누어 먹었다. 얼마나 이곳이 안정이 안 되었던지 우리가 있는 동안에 앞집에서 이사를 7~8회 하는 것을 보면서 이 어려움을 언제나 면할까 하였다. 그런가 하면 조산소집 뒷골목은 청소년 우범지여서 밤이면 청년들이 패싸움을 벌이기도하고 여인숙 골목이라 아가씨들 데리고 여인숙으로 데릭 갈려는데 안 가려 몸부림치는 소리 밤이면 오싹오싹 몸이 조여드는 때가 얼마나 자주 있었던가? 그래도 우리는 늘 보호를 받고 있기에 어제도 청소년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장다리아, 이소피아 언니가 소임을 왔다. 또한 빈민들의 건강을 위해서는 서울 가톨릭 성모병원 사회사업과를 자주 찾아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그때마다 본당 이명기 바르바라 신부님의 추천서 역시 힘을 실어주셔서 성모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하였다. 그런 관계로 성모병원 간호과장님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부탁 아닌 의뢰가 들어왔다. 조산면허 취득과정을 위한 실습자가 실습할 곳을 찾고 있는데 우리 성모조산소에 분만건이 많다는 소식을 들어 의뢰한다고 하셨다. 우리로서는 기쁜소식이다. 그리하여 자매결연을 맺고 실습기관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언니 두 분 김비비안나, 장다리아 언니가 조산면허 취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실습은 우리집에서 하게되니 1년 기간을 수월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인원이 불어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박분다 언니를 가톨릭 교리신학원 야간을 등록하게 되었고 이소피아 언니는 본인이 필요한 교육을 받으러 서울로 다니게 되었다. 모두 1년 후에 조산면허를 취득하였다. 분다 언니도 교리신학원을 무난히 졸업하였다. 그런데 언니들이 농촌사목 체험을 하고 싶어 하여서 수원교구 고색동 본당 소속 도일 공소에 자진하여 봉사활동을 폈다. 김비비안나 언니, 박분다 언니, 장다리아 언니들이 1주에 한 번씩 나가게 되었는데 주일 날 첫 미사 끝나고 떠나면 버스타고 3시간 소요되는 거리이다. 그런데 1시간 거리는 그중에서 비포장 도로여서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도 주일을 기다렸다. 기쁘게 다니더니 교리지도하에 17명이나 영세자를 내었다. 그곳은 일찍이 김보나 수녀님께서 2박3일간 봉사활동을 해 놓으신 곳이기도 하다. 1995년 12월25일 도일 공소가 군자성당으로 승격되어 신축하여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무한한 축복이여 찬미영광 받으소서!
한 번은 장다리아 언니가 태반 처리를 하면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수구 앞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직 소임 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 손대지 말라고 했지만 다리아 언니의 희생심을 어떻게 말리랴! 그때는 태반 처리하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건소에서 수거를 하지 않았다.
뜻밖에 독일 메세레올에서 원조금 1억이 나왔다. 그동안 의료분야의 일을 의사없이 해보는 것은 처음이며 그에 따른 위험을 체험할 때마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의사 한분 모시고 일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래서 앞으로는 의사 한분 모시고 의원개설하고 싶은 것이 바램이었다. 그리하여 원조금으로 건물을 짓고 의사를 모시려면 그에 따른 새로운 계획이 필요하기에 개인병원 운영하시는 수녀님들의 경우를 참작하고 조언도 얻으려는데 시기적으로 급변하는 사회여건이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게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톨릭 계통의 개인 병원들이 의사문제로 수난을 겪고 있었고 종합병원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숙고해야 했다. 땅은 총원과 상의하여 수진동 성당 아래 99평을 소개받아 수월하게 매입하게 되었다. 나는 의사 모시는 일에 모두하게 되었고 좀 더 조언을 얻기 위해 서울 분도병원 윤엘리사벳 수녀님을 찾아 뵙고 구체적인 조언을 들어보았다. 수녀님께서도 서슴없이 말씀해주시면서 종합병원체제라면 모를까 의사모시는 일이 얼마나 고충이 따르는지 많이 생각해야 한다며 만류하고 싶다고 하신다. 그래도 의사 한분 모시는 꿈이 수포로 사라지기란 그동안의 애로사항을 생각하며 가톨릭의대에 의뢰해 보았다. 개인병원에서는 전문의라면 어렵고 혹 파견한다 하여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여 개인병원 하시던 분을 알아보니 한 달에 관사 포함하여 400여만원 지출이 되어야 한다. 차라리 400여만원을 성남의 빈민들을 위해 풀어 놓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결국 총원에 의뢰하였으나 총원역시 전문분야에 대한 일이라 현지에서 체험하는 언니들의 의견을 중히 여기시어 별다른 도움을 얻기가 어려웠다. 참으로 우리는 고민하였고 꿈을 포기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의료분야의 전문적 도움이 아쉬웠지만 우리 수도회로써 한계가 아닌가 생각하고 즐거운 고민을 접어두었다.
원조금 관리를 위해서 경리담당으로 김까리따스 수녀님께서 오셨고 건축책임은 임헬가 언니가 맡아 수고해 주기로 하였다. 새로운 건축을 위해 설계사는 독일 미세레올에서 지정된 한국인이었고 건축은 공개 입찰하여 시작한지 1년여만에 완공되어 1978년 7월 6일 낙성식을 갖게 되었다. 윤에릭 신부님과 본당 이명기 신부님, 시장님과 보건소장 및 관계부처 귀빈들 그리고 수도가족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낙성식이 끝났다. 그 당시에 성남에서는 처음으로 3층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그동안 전셋집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난관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 편이 되어주셨고 또한 성모님의 보호아래 늘 따스한 손길이 함께 하여주셨음을 실감하며 살아왔다. 은인들 모두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신축 건물은 연건평 312평이나 되는 결코 적지 않은 공간에서 우리는 그동안 활발히 못했던 가족계획 상담실을 평신도를 유급자로 한 분 증원하여 가가호호 방문하여 홍보에 적극성을 가지게 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는 성남시가 서서히 자리를 잡으면서 의외로 청소년 문제가 심각한 상태로 발생하고 있었다. 청소년들의 미혼모가 생기고 상담하여 낙태를 근절시키며 춘천 미혼모의 집을 소개하여 주어도 병원으로 가서 쉽게 낙태를 시키곤 하였다. 고민을 하며 성교육을 상담시간에 시키면서 안타까움을 겪어야 했다.
의사 모시는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지역 빈민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실시하여 돕고자 하였다. 가톨릭의대를 찾아가 무료진료 시에 봉사할 의사를 부탁드리고 기다렸다. 다행히 연락이 곧 왔다. 봉사할 뜻이 있는 분을 소개하여 주었다. 찾아 가보니 서울 청담동에서 내과, 소아과 전문의로서 순심의원을 하고 계시는 분이셨다. 인사를 드리니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우리의 취지를 말씀드리며 무료진료를 부탁드리니 흔쾌히 허락하여 주셨다. 원장님은 서영복 마리아막달레나로서 시인 구상씨 부인이셨고 성모님 같이 잔잔한 미소에 포근한 인상을 주셨다. 그리하여 1주에 한 번 토요일 오후에 무료진료를 실시하게 되었고 진료가 거듭될수록 환자들은 늘어나서 매주 토요일 오후면 조산소 앞길까지 장사진을 이루었다. 의사선생님이 진료를 잘해주시고 약이 좋아 효과가 매우 좋다고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5~6개월이 되었을 때 보건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의사협회로부터 진정서가 들어왔으니 하던 일을 중단하라고, 이유라면 조산소에서 진료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것이다. 앰뷸런스만 있다면 순회진료를 하고 싶었지만 준비가 안되었고 진료는 일단 중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영복 원장님께서도 당신도 의사이지만 면목이 없다며 우리 마음을 달래주셨다. 날로 출산모 수효가 불어나 종합병원 수효보다 훨씬 넘은 숫자였다. 여기에 따르는 전문 인력난이 우리의 애로사항이 되었다. 그때 함께 일해 준 언니들은 허리가 휠 정도로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건강이 염려되었다.
그러면서도 비비안나 언니와 분다 언니는 농촌사목의 꿈을 접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목을 하시는 부산교구 소속 박유식 신부님께서 육군종합행정학교에 봉사를 청했다. 이때 두 언니들이 주말에는 행정학교에 나가서 올겐 반주와 미사 후에는 성모회와 반모임을 참석하여 도와주고 나중에는 군인가족 자녀를 첫영성체 교리반을 지도하여 11명의 첫영성체자를 나오게 하였다. 지칠 줄 모르고 늘 헌신적인 사랑의 마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대수술 후 계속되는 업무가 무리가 되었는지 전신에 류마치스 관절염이 발생하여 소임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왔다. 이제는 일손을 놓아야만 되는데 집짓고 1년이 중요하다고 하여 버티어 온 것이 한계를 초래한 것 같았다. 그동안은 조산원 면회소지자 때문에도 문제는 되었지만 언니들이 두분이나 면허를 취득하였고 부담없이 소임을 떠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총원에 청을 드렸다. 그리하여 후임으로 두분 수녀님이 마침 독일에서 소임을 마치고 나오게 되어 오시니 일손도 충분하게 되어 퍽 다행이었다.
그런데 차질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던 왕진과 가정방문을 못하겠다고 한다. 왕진과 가정방문은 산모들의 산후 안전을 위해 필수였는데 그리고 신생아들을 돌보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본래의 정신에서 멀어지는 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딱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허지만 이해는 간다. 초기에는 24시간 대기 상태의 근무를 하였다면 신축건물로 이사 후에는 출산률이 많아 (월 13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2부 교대를 하고 있는 중이며 앞으로 인원이 더 충당되면 3부 교대도 가능하리라 기대를 하고 있었다. 현재 직원은 조산면허 소지자 4명, 일반 간호사 2명, 간호보조 1명, 관리책임 1명, 경리담당 1명, 주방담당 2명, 안내실 1명, 위생관리 1명, 가족계획실 1명으로 총 14명이 확보되어 있었다. 나는 소임을 마치면 되지만 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째 팀 구성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은 것을 깨달았고 그동안에 함께 수고를 아끼지 않은 언니들의 노고에 마음이 저며 왔다.
이 시점에서 나는 잠시 생각에 머물러보았다. 우리가 이 사업을 시작할 당시만 하여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니까 국가에서는 대책을 세운 것이 마구잡이 산아제한을 하더니 지금은 불과 30년 전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정책이 30년을 못 내다본다는 결론이 아닐까?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지금은 신생아 출산률이 세계에서 둘째로 꼴찌라니! 참으로 비관적이 아닐 수 없다. 1970년 초만 하여도 보리고개를 면치 못했고 생계유지가 급선무로 되어 있었는데... 요즘 우리 사회에는 3D현상 때문에 인력난이 생기고 있지만 한쪽에서는 노숙자로 있으면서도 일을 안하고 버틴다. 더구나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낭비늘 얼마나 많은가. 먹자문화, 여행문화, 팻션문화, 목욕탕 문화, 연수문화까지 줄을 이어 기러기아빠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물질문명이 발달하니 요즈음 사회사업 분야의 복지처도 옛날 같지 않다. 풍요롭다. 그런데도 부모님 모시기 어렵다고 현대식 고려장이 생기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 그러면서 국가에서는 출생률 낮은 것에만 걱정을 하니 남의 일이 아니다. 국가의 국력이 국민이고 총대는 정신력인데 경제성장에만 계획을 했었지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전무했었나? 요즘 건강이 우상이 되다싶이 하는 현상을 보면서 나는 잠시 우려의 소리를 늘어놓았다. 정신건강 영신건강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구원에 이르는 길이 어떻게 될까?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하느님께 분발하자 다짐해본다. 1979년 8월 16일자로 7년의 소임을 뒤로 할 수 있었기에 죄송하면서도 감사를 드려야 했다. 페이지 40부터는 쓸데없는 회고의 푸념이 되었다. 생략을 해도 무방합니다. 긴 세월 흘러간 것을 기억을 되살리려니 졸필에다 늙음의 한 면을 그대로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읽어 주시는 분의 수고가 많을 것입니다. 총원장 수녀님과 이엘리사벳 수녀님의 권유로 두서없이 써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설립자 신부님 영명축일에 마치게 되어 감사로움이 더 큽니다.
추신 : 성모조산소에서 출생한 애기 중에 신학교 수업 중에 있는 서울교구 전동진 스테파노가 3학년 재학중에 있고 우리 수도회에 신수련 정은주 스텔라가 있습니다.